장's 그림 마당

22번째의 날,포스트모더니즘은 어디로?

여행하는 화가 2019. 6. 5. 16:55

 포스트모더니즘은 무엇일까? 23년 전부터 가끔 생각해 왔었지만 아직도 그 명확한 답은 없다. 애초에 그 제대로 된 답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에 관한 책들을 오래전부터 조금은 봐왔고, 사고 읽기도 했지만 그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것을 제대로 바르게 말하는 것이란 처음부터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것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 합체이기도 하고 더 미래이기도 하고 더 과거이기도 하고 뒤죽박죽이기도 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만의 완벽한 질서를 갖는 것이지도 모르기에 그 명확한 정의와 질서 정연한 논리란 것은 있을 수 없는 것 그것 자체가 포스트모더니즘 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그 용어는 그 어느 시기에 한정된 것도 아니고 그 시대 시대마다의 또다는 정의 아닌 정의가 내려지고, 아니 그 정의를 내보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말장난 같지만 그러한 것이 그렇게 불명확한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인 것임에 분명할 것이기에 이렇게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 아원의 작품에서도 이제는 포스트모더니즘 같은 시대가 도래한 거 아닌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공백 기간을 갖고 있으니 뭔가 변화가 당연히 있는 중이고, 연구 중이고, 생각 중이고, 공부 중이기에 뭔가 여러 가지의 변화가 가능하고 , 있는 것이 정상이 될 거 같다. 아원의 포스트모더니즘 시기는 어떠한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 것일까? 나조차도 궁금하다. 이제 정말 그 시기가 돌아왔고 아주 조만간에 그 작품들을 그려가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오늘 내 작업실 안의 변화를 추구하였다. 이사한 지 이제 22일째인데 첫 번째 세팅의 책상과 책장들의 구조를 좀 변경하여 빈 공간을 좀 만들었다. 그 빈 공간에다가 큰 작품이나 작은 작품을 놓아서 할 것인지, 아니면 작은 텐트라도 사서 거기다가 설치를 할 것인지 나도 아직은 모르겠다. 요즘 캠핑에 빠져서 정말 작은, 설치하기 쉬운 텐트라도 사서 거기다가 설치하고픈 생각도 많이 든다. 

 하여간 뭔가 이제는 변화 중이다. 아직 체력도 부족하고 완벽한 건강상태도 아닌 거 같지만 조금씩 뭔가 꿈틀거리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 꿈틀거림 속에는 뭐가 들어있을까? 한 작가의 그림의 역사는 어쩌면 인류의 그림과 미술의 역사를 반복하는지도 모르겠다. 그 길고 긴, 다양한 역사 중에서 아주 다는 아닐 테니까 그중 어느 것을 취하고 어느 것을 버릴지는 그 작가의 취향과 그 작가의 상태와 그림의 방향에 관련되겠지만 그중에 아원의 작품의 역사는 어떻게 와서 어떻게 변화되어 가고 있는지 나 스스로도 너무나도 궁금하고 궁금하다. 

 아원 그림의 역사가 역사 속의 미술과 그림의 역사를 반복하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원은 처음에 바로 추상미술을 하였기 때문이다. 닥종이와 한지 그리고 목 등을 이용한 추상적인 뭔가 메시지를 전하는 작업을 초기. 작품 전시회에 내었다. 아 참 그 이전에 누드크로키를 이용한 작품들을 작품 전시회에 냈던 이력이 있기도 하다. 프랑스 유학을 가려고 했던 홍대 근처 개인 화실을 다녔던 시기의 그때의 일이다. 그 선생님 가족은 어디에서 잘 지내고 계시겠지.. 아주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그때의 그 한치의 의심도 없었던 그 열정과 그 순수와 그 소망들은 어디에서 무엇이 되었을까? 내 세포 속의 어딘가에 잘 숨어 있으리라 믿어 본다. 그러다가 이러저러한 기막힌 사정으로 유학을 못 가게 되고 다른 인생의 길로 가게 되고 그래도 포기를 못하고 홍대 언저리에서 시간제로 공부를 하여 한국화 학사를 갖게 되고 아이들을 가르치게 되고 그리하여 그룹전과 단체전과 개인전까지 하게 되는 유명하지는 않지만 한국화 작가로서의 길을 조금씩 조금씩 걸어왔다. 

 아원은 초기의 추상미술의 시기를 거쳐서 그다음의 시기는 불교미술의 시기였다. 파리 유학을 못 가고 여러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청강을 하여 동국대 미술사학과에 잠시 다니게 되었을 때 (처음엔 서양미술사에 빠졌다가) 점차 동양으로 오더니 한국미술의 불교미술에 빠졌던 경험을 살려서인지 불교적 소재를 가지고 작품을 하게 되었다. 청동이나 석 조각의 색채 없음에 나름의 색채를 입혀서 아원의 그림 작품을 하게 된 것이다. 

  그다음 아원 장선아의 그림의 시기는 자연의 시기였다. 다시 말하면 나비의 시대였다. 어느 날 , 아니 정확히는 사진 찍으러 캄보디아 앙코르 왓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나를 따라온 노랑나비를 시작으로 해서 (그 이 전에도 아원은  나비 이미지를 많이 좋아했다) 나비를 존재의 상징으로 해서 화면에 크게 그리고, 한국적 오방색을 쓰면서 이 세상의 존재와 우주의 느낌을, 작은 존재이지만 그 커다란 우주 안에서 아주 소중해야 할 커다란 존재라는 것을 나비와 간략화된 오방색면으로 표현된 세상으로 표현하는 등으로 다양하게 시도하였다. 나중에는 한국적 떡살 문양 등 한국적 문양을 그림 속에 넣어서 한국적이면서도 범인류적인 인간사랑, 자연사랑을 표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제 나 아원 장선아는 그 시기를 지나고 있다. 물론 그 시기의 느낌들을 그리고 싶을 때는 언제든 그릴 수 있다. 하지만 뭔가 더 다른, 뭔가 더 새로운 , 뭔가 연구를 한 결과인, 뭔가를 그려야 할 시기가 된 것이다. 의무적인 것은 아니지만 과도기를 가졌으니, 쉼을 가졌으니, 인생의 어느 지점을 지나가고 있으니 나의 작품의 느낌들도 어느 정도는 자연스레 달라지는 거 아닌가 싶은 것이다. 그게 당연한 거 같다. 

 무엇으로 아원의 내일을 표현할까? 무엇으로 아원의 포스트모더니즘을 표현할까? 무엇일까? 어떤 느낌일까? 아주 아주 아주 궁금하다.